나는 그날 신이 들려 작두를 탔다
그날 나는 신이 들려 작두를 탔다
엊그제 센터빌 빵잡 신라제과에서 강사장을 만났다.
얼추 잡아도 얼굴 못 본 지가 7.8년 되는 가 보다.
너무 오랜만이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요즘 어떻게 지내냐며
서로 간의 근황을 물었다.
강사장은 내가 진즉 건축일 그만두고 전업했다는 말 들었다며
자기도 이젠 힘이 들어 곧 은퇴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냐니까,
나처럼 약질의 빌빌대는 몸은 이제 그만 해야지, 했다.
내가 강사장님, 지금 건축일 몇년 했냐고 물으니 미국에서만 38년 했다고 했다.
나보고 올해 나이가 얼마냐 묻기에 사장님과 일곱 살 차이 아니냐며
나도 미국 생활 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어 버렸다고 대답했다.
강사장은 세월 참 빠르다며 신형 나하고 일할때만 해도 쌩쌩 날았지, 하며
그때 사이딩 7박스 반 일했던 것 생각나냐고 물었다.
자기 건축경력 38년 동안 그때 신형이 하루에 사이딩 7박스 반을 일한게
그전 그 후도 없는 불멸의 최고 기록이다고 했다.
나도 그 후로 건축일을 5.6년 더했지만 하루에 4박스 이상 일한 기억이 없다고 하며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 하기 그지없고 뭐가 씌었던가 보다고 대답했다.
그날 있었던 이해 안되는 불가사의한 하루 이야기를 있었던
가감 없이 그대로 해보려 한다.
미국에 온 지 3년 후쯤이니 오래전 일이다.
그날은 날씨가 쾌청한 4월 5일 식목일이었다.
전날 저녁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 시간에 고향 친구들 만나는 시간인데…
4.5일 식목일은 객지에 흩어져 사는 고향 동네 열명쯤 되는 구들과
매년 정기적으로 두 번 만나는 전반기 모임날이다.
4.4일날 오후에 만나 저녁과 술을 먹고 저녁내 모텔방에서
노닥거리며 늦게까지 재미있게 놀다가,
다음날은 유원지 같은 데 가서 식목일날 재미있게 보내는 건데…
한국에서 고향 친구들과 보냈던 달콤한 추억들을 떠올리며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도 가뿐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미국에 들어 올때는 2.3년 술을 과음한 탓에 몸도 마음도 찌들어 체력이 밑바닥이었다.
건축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되는 그때만 해도 건축 경기가 괜찮았다.
3년여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술을 절제하니 밑바닥이었전 체력은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건축 외장일인 사이딩 일을 오너인 강사장과 단둘이 일을 했다.
불과 2년 만에 성질이 안 맞아 오너를 12명을 갈아치웠다.
강사장과 만났을 때는 기술도 일취월장해 거의 매캐닉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7살 많은 강사장은 천성적으로 점잖은 사람이었다.
말도 다른 오너들처럼 거칠지 않고 선비 스타일의 점잖은 선비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내가 강사 장하고 2년 반을 일하고 영주권 스폰서 때문에 회사로 옮기느라
그만두었지만 일하는 동안 서로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잘 지냈다.
미국에서 건축일을 한 오너밑에 2년 반을 있었으면 일자리를 자주 옮기는
건축 일의 특성을 감안하면 제법 오랜 시간이다.
나는 그전에는 오너들의 거친 말과 행동에 거부감이 강하게 들어
그렇게 단시간에 많은 오너를 바꾸고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ㅏ
.
그날 아침 현장에 도착하니 싱글 하우스 중에서도 상당히 큰집이었다.
특히 옆 벽이 엄청 넓었다. 일의 순서는 제일 면적이 큰 먼저 옆 벽부터 시작한다.
벽 높이가 높아 기둥이 짧아 익스텐션을 꼽아 벽 양쪽에 세웠다.
강사장은 업보드에 사이딩 두 박스를 나와 둘이 들어 실으며
신형은 오늘 혼자 일하니 쉬엄쉬엄 이것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 두 박스만 해도 회사에서 받는 인건비가 480$( 약 50만 원)이니
내 일당 150$ ( 약 16만 원) 제하고도 330$(약 40만원)이 자기 차지니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강사장 트럭을 타고 출퇴근을 같이 했는데
아침에 오면서 자기는 오늘 밖에서 개인적인 볼 일이 있다고 했다.
강사장은 떠나며 지금 나갔다가 오후 늦게나 온다고 했다.
혼자 일하니 사고 나면 큰 일 난다며 서두르지 말고
하루종일 천천히 조심해서 일하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날은 이상하게 몸이 날리는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면서 언뜻 스치는 생각이 “에이,.. 오늘 한국 생각도 많이 나는데…
오늘따라 몸도 가뿐하고 컨디션이 최상이니 그런저런 잡생각 안들 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이나 한번 죽도록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장이 떠나자 업보드 위에 사이딩 두 박스를 더 얹어 네 박스를 실었다.
중간에 물 먹으려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물통을 서서 일하는 올림판 안전망에 걸었다.
툴벨트 왼쪽 주머니에 못을 한가득 넣었다.
2.3킬로 되는 못의 무게에 어깨에 맨 툴벨트 멜빵끈이 짱짱하게 늘어지며
못 주머니가 아래도 축 쳐졌다.
자,, 준비는 모두 끝났다. 자 간다! 출발! 하고 소리치며
왼손을 들어 시계를 보니 오전 정각 9시였다.
사이딩을 벽에 못을 박아 붙이는데 그날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스티로폼 안에 있는 벽의 세로 기둥이 제대로 된 집이었다.
기둥에 못을 박아야 사이딩이 제대로 고정되어 강풍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 기둥이 아닌 스티로폼만 통과하는 허당에 못을 박으면 사이딩이
벽면에 편평하게 고정이 안될 뿐 아니라 센 바람이 불면 다 떨어져 나간다.
그런데다 사이딩도 비싼 가격의 재질이 좋은 사이딩이라 이어주는 락끼리
딱딱 잘 들어맞아 어디 거침이 없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일 시작 두어 시간 후 몸까지 풀리자 일의 속도가 엄청 붙기 시작했다.
딱 따닥… 딱 딱딱… 딱 딱딱… 망치 머리가 못 대가리에 맞는 소리가
음률에 맞춰 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잡생각이 일시에 멈춘 무아의 경지라고나 할까,
오직 앞에 보이는 것은 벽에 붙여야 할 사이딩뿐이고 귀에 들리는 건
맟치가 못 대가리를 때리는 소리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24장씩 들어있는 사이딩 세 박스는 어느새 벽에 다 붙여지고
네 번째 박스가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 2시였다.
다시 업보드를 밑으로 내려 사이딩 세 박스를 더 얹고는
한쪽 구석진 곳으로 가 소변을 빈 음료수병에 누고는
다시 업보드를 올려 망치질을 시작했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작두 위에서 부채춤을 추며 살풀이하듯
미친 듯이 일을 일했다.
그 세 박스 마지막 박스 맡바닥이 보였을 때는 날이 어두워지며
그 넓은 벽면이 사이딩 외장재로 다 덮여 있었다.
강사장이 집에서 미리 접어 가져온 알루미늄 코일을
처마 렉 보드까지 붙이고 내려왔다.
오늘 내가 한 일 량을 보니 내가 봐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일하며 잔디밭으로 떨어진 사이딩을 자르고 남은 부스러기
청소를 하고 있으니 강사장이 돌아왔다.
강사장은 내가 일한 량을 보고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는 듯이
“와! 와!, 놀랍다 놀라워!”를 연발하며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냐며 그저 놀라울 뿐이다고 했다.
그가 아침에 떠나며 차에서 내려 놔둔 채로 그대로 있는
내 도시락 박스를 보고는 “점심은 먹었냐? 고 물었다.
나는 “안 먹는 것 같다” 고 대답했다.
그는 다시 “내일 일어날 수 있겠냐? 고 물었다.
나는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내일부터 일당 30불 올려준다고 했다.
일당은 보통 6개월에 10$씩 올려주는데 한 번에 30$을 올려주는 것은
파격적 안 인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날 일한량의 인건비는 내 일당 2주 치
곧 12일 치 1.800$(약 200만 원) 어치였다.
나는 지금도 그날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그 후 7.8년 건축일을 더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루에 4박스 이상 벽에 붙인 적이 없다.
그날은 미국에서 일 제일 빨리하다 죽은 혼령이 내 등에 올라탔던지..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딱 그날 하루였다. 지금 이 순간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두 번 다시 일어나기 힘든 내 인생의 불가사의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