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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속 북천 사자 놀이 소개

정성 글 2024. 4. 3. 12:00

북청 사자 놀이

한국의 민속 북청 사자놀이 소개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로,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행사로 널리 행해졌다. 이 지방에서는 동네마다 사자를 꾸며서 놀았는데 각 동네에서 사자가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경연이 벌어졌다. 관원놀음과 함께 행해진 토성리의 사자놀음이 강세를 보이면서 다른 곳의 사자놀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민속놀이로 정착된 가면놀이로,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북청 사자 놀이 소개

북청 사자 놀이 이름 뜻

지방에 따라서는 주지놀음(河回)·사지놀음(廣州)·사자놀음(北靑)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나무나 대광주리·종이를 가지고 만든 사자탈 속에 두 사람이 들어가 쓰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때에 여유 있는 집으로 들어가 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논 뒤에, 그 집주인으로부터 사례로 곡물이나 금전 등을 받는다. 이 곡물과 금전은 마을을 위한 공공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시대의 변천으로 옛날같이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연희되지는 않는다.

북청 사자놀이 연혁

조선시대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의 낙성연도(落成宴圖)에는 3명의 몰이꾼이 사자와 범 한 마리씩을 놀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887년(고종 24) ‘성천잡극(成川雜劇)’이라 하여 사자무를 시용(始用)하였다는 필사본 기록에는, “악기만방녕(樂氣萬方寧)의 곡(영산회상)에 사자 두 마리가 풍류를 따라서 몸을 흔들고 뛰어나간다.

이 사자들은 동과 서로 나뉘어 북으로 향하여 머리를 들고, 입으로 땅을 두드리고, 눈을 번쩍이며 일어난다. 풍류장단에 맞추어 꼬리를 휘두르고 발로 뛰며 좌우로 돌아보고, 또 입을 벌리고 이빨을 딱딱거리며 나가고, 물고 돌아 즐거이 춤추다가 물러가며, 풍류도 그쳤다.”라고 하였다. 이 사자놀이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사자놀이가 보인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鄕樂雜詠> 5수와 백낙천(白樂天)의 <신악부 新樂府>에 의하면, 이 사자놀이는 원래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그것이 당나라 때에 신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중국학자는 기원지를 서역 구자국(龜玆國)으로 보고 그것이 한(漢) 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와 수(隋)·당(唐) 나라 때에는 이 놀음이 중국 각지에 성행되었다고 한다.

광복 8년 전까지만 해도 정초의 벽사(辟邪)에 북청(北靑)·정평(定平)·종성(鐘城)·명천(明川)·회령(會寧)·경성(鏡城)·경흥(慶興)·고성(高城)·횡성(橫城)·순천(順川)·광주(廣州)·안성(安城)·송화(松禾)·은율(殷栗)·해주(海州)·봉산(鳳山)·마산(馬山)·통영(統營)·수영(水營)·김해(金海)·남해(南海)·아산(牙山)·경주(慶州) 등 큰 고을 20여 곳에서 행하여졌다. 그중에서도 지방으로는 북청의 사자놀음이 봉산가면극의 사자춤과 더불어 한때 그 이름이 높았다.

북청 사자 놀이 구성

사자춤에는 머리 쪽에 한 사람, 뒤쪽에 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며, 사자가 큰 경우에는 몸뚱이 쪽에 한 사람이 더 들어가서 추기도 한다. 춤의 동작은 꼿꼿하게 높이 솟기도 하고, 앉아서 좌우로 몸을 돌려 이 잡는 시늉을 하기도 하며, 꼬리를 흔들면서 몸을 긁기도 한다.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이 사자놀이에는 대체로 사자 한 마리가 나오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두 마리도 나온다. 왕년에 경주지방에서 축사연상의 주원으로서 행하여졌던 사자놀이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나와 싸웠으며, 하회가면극(河回假面劇)에도 두 마리가 나와 싸웠다. 한국의 민속 가면극에는 사자놀음이 한 과장(科場)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봉산탈춤에서는 마부(사자몰이)가 채찍으로 사자를 때리면 사자는 성이 나서 날뛰기 시작한다. 마부가 겁이 나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사자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지금은 사자에게 파계에 대한 용서를 빌고 함께 춤을 춘다. 이러한 사자놀음이 가면극에 한 과장으로 나오는 것은 강령(康翎)·서흥(瑞興)·황주(黃州)탈춤에서뿐만 아니라, 마산·통영·김해·수영 가면극에서도 나온다.

결론

북청사자놀음은 음력 1월 14일 밤에 장정들의 횃불싸움으로 시작되어 15일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16일부터는 초청받은 유지의 집을 돌며 놀았다. 먼저 마당돌이를 하고 사당춤, 무동춤, 꼽추춤 등으로 놀면 사자가 입장하여 한바탕 사자춤을 춘다. 사자가 안뜰을 거쳐 안방과 부엌에 들어가서 입을 벌려 무엇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 다시 마당에 나와 활달하고 기교적인 춤을 추는데 이때 주인의 청에 따라 부엌의 조왕과 집안에 모셔 놓은 조령에게 절을 한다.
사자가 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대사를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고, 효험이 없으면 의원을 불러 침을 놓아 일어나면 전원이 등장하여 함께 춤을 추며, 쌍사자를 놀리기도 한다. 놀음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 등이 등장하는데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는 탈을 쓰지 않고 복장만 갖추고 나온다. 악기로는 퉁소, 북, 징, 장구 등이 쓰이는데, 특히 경기지역의 탈춤은 삼현육각, 영남지방은 꽹과리가 위주인 것에 비해 퉁소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를 사자에게 태우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사자에 태우기도 하고, 장수를 빌며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몸에 달아주기도 한다. 집집마다 돌며 거둔 돈이나 곡식은 마을의 장학금, 빈민구제, 경로회비용 및 사자춤비용 등에 사용한다.

일본학자들 역시 이 춤은 서역에서 중국에 들어왔다가 한국으로 들어오고 또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자놀이는 원래 다른 여러 가지 무악(舞樂)과 함께 신라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벽사에 이용되어 민간에 널리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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