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국 이민 생활 경험 수기

경착륙 USA(10 마지막 편)

by 정성 글 2025. 2. 23.

미국 이민 생활 경험

 

나 같은 사람이 박사면 세상에 박사 천지여서 진짜 박사들 다 굶어 죽으요” 하면 종석이 형님은 “진짜 박사도 있고, 자네처럼 다방면으로 많이 알면 호칭만 박사고” 했다.

종석이 형님은 3.000$짜리 은행 잔고 증명서를 어렵사리 구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어제까지도 도저히 3.000$짜리 잔고 증명서를 구할 길이 없었는데,

1년 전부터 자기 통장으로 돈 송금을 해오던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어젯밤 늦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형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한국의 형님 친구 가족이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유학시키려고, 엄마와 아들들만 여기서 기러기 가족으로 산다고 했다.

그들도 나처럼 은행 계좌가 없어 형님 통장으로 돈을 받아 계속 전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달 돈 보낼 날이 아직 2주일이나 남았는데 그때 마침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매달 보내는 돈을 3일 전에 이미 보냈으니 통장 확인해 보라고 해서 오늘 아침 은행으로 가서 통장 확인해 보니 딱 3.000$(약 330만 원)가 입금돼 있었다고 했다.

친구 부인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니, 친구 부인도 승낙해 은행으로 가 3.000$(약 330만 원)짜리 잔액 증명서를 떼어 가져왔다고 했다.

종석이 형님은 “야, 놀랄 노 자다, 어떻게 이렇게 적시에 꼭 필요한 잔액 3.000$(약 330만 원)가 입금될 수가 있냐며, 어쨌든 자기도 그동안 걱정 많이 했다며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어 내 마음도 후련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미국 입국해 3개월 만에 먹어보는 한국 음식이었다.

종석이 형님이 선지가 둥둥 떠 있는 해장국을 저으며 오랜만에 해장국 먹는다고 입맛을 다셨다.

나도 김이 모락모락 하얀 쌀밥을 수저 한가득 퍼 입에 넣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수저에 가득 떠 입에 넣는데, 요 며칠 잔고 증명서를 구할 길 없어 입에서 쓴 내가 날 정도로 애가 탄 뱃속에서 울컥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들이 겹쳤던 거 같다.

감정이 복받친 제일 큰 이유는 종석이 형님이 자기 일처럼 신경을 써주어 나를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하게 해준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울먹이느라 밥을 못 먹고 있으니, 종석이 형님이 “야! 아줌마처럼 왜 울고 그러냐?” 해, 내가 시치미를 떼며 “김치찌개가 너무 매워서”하고는 둘 다 허허 웃고 말았다.

내가 공깃밥과 김치찌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먹어 치우자, 종석이 형님은 웨이트리스를 부르더니, 여기 공깃밥 하나 더 주고 빈 국그릇 하나 주라고 했다.

웨이트리스가 밥과 빈 국그릇을 가져오자, 공깃밥과 자기 먹기엔 해장국 양이 너무 많다며 다른 그릇에 갈라놓았던 해장국을 내 빈 국그릇에 부어주며, 그동안 애 많이 탔겠다며 앞으론 가끔 여기 와서 식사하자 했다 그러나 그날이 그 형님과 하는 마지막 식사 시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입학 허가가 떨어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20년 만에 학생이 되었다.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제2 언어로써 영어) 코스 프로그램을 배우는 학교였지만, 오랫동안 놓았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됐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걱정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설렘과 기대도 컸다.

학교생활은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우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교수 방법이 내가 20년 전 한국에서 받았던 학교 수업과는 판이하게 느껴졌다. 외우는 암기 수업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해하기 쉽게 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관심이 많은 어학 수업이라 더 재미가 있었다.

금방 두세 주일이 지나고 학교에 다닌 지 한 달여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거의 매주 그 주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에 종석이 형님을 만났는데 그날은 표정이 시무룩했다.

 

내가 형님 안색이 너무 안 좋다고 하니 그는 집안 형님이 있는 뉴욕으로 가게 됐다고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지금 같이 사는 여자하고는 영주권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고 처음 약속했던 대로 살림에 보태기로 한 거액의 돈을 이미 다 지급했는데도, 어떻게 자기 앞으로 등기가 된 아파트 한 채가 서울에 남아 있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그 후부터는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동원돼 영주권 받고 미국에 살게 해 주었으니 아파트 팔아서 돈 더 내놓으라고 온갖 협박을 하며 괴롭혀 왔다고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뉴욕에서 그로써리를 하는 집안 형님이 마침 직원 하나가 사정이 생겨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물건 계산대를 맡길 사람이 한사람 급하게 필요하니, 네가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뉴욕으로 가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내일 아침에 뉴욕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종석이 형님이 떠나면 정월 대보름 다음 날 허허벌판에서 혼자 나뒹구는 끈 떨어진 연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어 앞으로 지낼 일을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금방 맥이 풀렸다.

종석이 형님이 풀이 죽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내 기분을 바꿔주려고 그랬는지,

“ 야, 신 박사! 너 오늘 주말 시험 봤지, 그 시험지 한번 내놔 봐” 했다.

나는 “무슨 시험지요” 했더니, 형님은 “ 잔말 말고 어서 내놔봐, 이번 주도 점수를 확인해야지” 했다.

 

나는 마지못해 가방에서 오늘 본 시험지를 내어주니 종석이 형님은 안타까움이 짙게 밴 목소리로, “ 야! 우리 신 박사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꼭 공부를 한 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놈의 세상 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돈이 원수다, 원수”라고 했다.

그때까지 일주일마다 보는 시험지를 종석이 형님은 마치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시험지를 어머니가 확인하듯 내 시험 점수를 궁금해하며, 오늘 본 시험지 한번 보자고 졸랐다.

시험지를 볼 때마다, 나는 이 학교 다니며 한 번도 이런 좋은 점수를 못 받았는데,

신 박사 너는 공부 참 잘한다고 칭찬했다.

 

그날도 일주일마다 한 번 시험 보는 금요일이었다그날 내 시험점수는 주관식 열 문제에서 아홉 문제는 맞고

한 문제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동그라미 아홉 개에 세모 한 개를 받은 95점 자리 시험지였다.

종석이 형님은 그 시험지를 둘둘 말아 쥐더니 애정이 담긴 시선을 내게 보내며 시험지로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내리치며 , 신 박사! 너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머지않아 한국에 있는 가족도 데려오고, 앞으로 꼭 좋은 날이 올 테니, 지금 좀 어렵더라도 이를 악물고 꾹 참고 잘 견뎌내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시험지를 앉아 있던 자리에 놓고 일어나며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인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차 밖으로 나와 와락 껴안고 긴 작별의 포옹을 했다.

 나는 내게서 멀어지는 형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 내 시야에서 종석이 형님이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내가 숙식하는 차 안으로 돌아왔다.  
금방까지 말아 쥐고 있었던 시험지, 종석이 형님의 따스한 손 기운이 남아 있는듯한 따스한 시험지를    

집어 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시험지를 한참 그대로 쳐다보고 있으니,
춥고 힘들었던 지난겨울의 시간이 한 편의 기록 영상이 되어 다시 비치고 있었다.

 

종석이 형님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겨우내 붙어 다니며 보냈던 추운 겨울의 따뜻한 순간들이

시험지 위로 순차적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흐르던 영상이 딱 멈춰 섰다.

시험지 위에는 종석이 형님이 은행 잔고 서류 두 장을 들고 서서,

신 박사! 너 이제 불법체류자 신세 면하게 됐다며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뜨겁고 굵은 눈물방울이 시험지 위로 똑똑 떨어졌다.

 

반응형

'미국 이민 생활 경험 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해 겨울 수네집 방 한 칸(2)  (0) 2025.02.23
그해 겨울 수네집 방 한 칸(1)  (0) 2025.02.23
경착륙 USA(9)  (0) 2025.02.23
경착륙 USA(8)  (0) 2025.02.23
경착륙 USA(7)  (0) 20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