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생활 경험
초저녁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지금 세 시간째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덜덜 떨며 서성거리는 중이다.
우리가 사는 셋방을 내일모레 토요일 저녁까지 비워주기로 해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밤 우리 네 식구가 이 겨울을 살아야 할 셋방을 얻어야 했다.
우리가 사는 지하 월세방은 이미 들어올 사람과 계약이 끝났다.
이사 오기로 한 사람들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인듯했다.
젊은 남녀가 한 번에 이삿짐을 다 옮기기 힘들다며 어제저녁부터 조그만 짐들을 가져와, 지하 월세방 출입문 옆 거실 바닥 한쪽에 잔뜩 쌓아 놓고 갔다.
나는 한국 신문 광고면에 셋방 내놓는다는 전화번호 다섯 개를 골라 메모지에 적었다.
메모지를 들고 나와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살아야 할 식구가 넷이라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수화기 너머 사람들은 안 되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마지막 전화번호 한 개가 남았다.
이마저 거절된다면 우리 네 식구는 이제 내일모레 밤부터 승용차 속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
나와 아내는 어떻게 견뎌 내겠지만, 7살 5살 된 두 아들이 동지섣달 추위에 차 속에서 밤을 지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밤에 방을 얻어야 했다.
마지막 남은 전화번호 집주인과 어렵게 통화가 됐다.
어쩐지 앞의 네 사람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 상업적이 아닌 좀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 수화기 너머 그녀는 우선 아들이 쓰던 방이라 아주 작다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우리는 7살 5살인 사내아이 둘과 우리 부부 합쳐 식구가 넷이라고 하자, 그 조그만 방에서 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전화 부스 안에서 내가 들고 있는 전화 수화기에 귀를 바싹대고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아내가, 내가 들고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가로챘다.
그러고는 수화기 너머 아주머니에게 일단 우리 만나서 조금만 얘기하자고 사정했다.
같은 여자로서 너무 안됐다 싶었는지 우리보고 지금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장소가 대형 그로써리 자이언츠 몰 건너편 주류 소매점 앞
전화부스라고 하니, 그녀는 익히 아는 장소라며 금방 갈 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나와 아내는 지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금 후에 나타날 집주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때가 내가 미국에 입국한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12월 22일에 메릴랜드주 조지 프린스 카운티 NASA, 즉 미 항공우주국 부설 연구소가 있는 그린벨트란 동네의 주류소매점 앞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 앞이었다.
그해 6월 말에 그 동네 지하 셋방으로 이사를 와서 6개월을 연명하다시피 하며 간신히 버티다, 집세를 못 내 우리 네 식구가 월셋집에서 쫓겨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집주인은 성이 심 씨인 은퇴한 한국 노인 부부였다.
주위 사람들한테 듣기로는 늦은 나이 황혼에 재혼한 부부라고 했다.
치 기공소를 제법 크게 운영해 돈을 많이 벌고 은퇴한 남자 주인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의 부인은 첫인상부터가 맘에 안 들었다. 차갑고 도도한 인상이라고나 할까, 자기 돈 앞에선 인정사정과 자비란 없고, 돈 앞에선 물 안 가리고 사족을 못 쓰는 부류의 여자 같았다.
우리가 아쉬워 셋방 얻어 사는 처지라 웬만하면 이해하려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상식 이하였다.
이사 첫날, 조그만 방 가운데 놓인 낡은 환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빈방에 웬 환풍기냐고 하니,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에 습기가 많아서 그런다고 했다.
그럼, 애초에 말해야 하지 않냐고 하니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라며 얼버무렸다.
그 거짓말이 기분이 안 좋지, 그녀가 솔직히 말했어도 우리는 이 집 지하로 이사를 왔을 것이다.
그전 버어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 애난데일 시에서는 애가 둘이나 딸려 방 한 칸짜리 셋방을 얻을 수 없었다.
습기가 있는 방은 이틀이 지나니 발을 디디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며 카펫 위로 물이 삐죽거리며 올라올 정도로 카펫 밑에 물이 벙벙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그 방을 아예 사용을 못 했다.
그리고 걸핏하면 그녀는 감시병처럼 지하로 내려와 우리를 살피고 돌아갔다.
그 습기 눅눅한 지하실에 무슨 감시할 게 그리 많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댔다. 두 아들이 지하 덱 밑에 깔린 조그만 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윗입술을 코 밑으로 씰룩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쫓겨나는 12월은, 이사 들어오기 전 직업을 물어봐 건축 외장 공사인 사이딩 일 한다고 했다.
겨울철이라 일감이 없어 내 차가 집에 세워져 있는 날이 많은 것을 보고 그잘 방세를 못 낼 거 같으니,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지하로 내려와 이달 방세는 문제없는 거냐고 묻고 올라갔다.
아내는 그 여자 발소리만 들어도 놀라 가슴이 콩닥거리며 뛴다며 괴로워했다
일이 없어 차가 집에 있으니 지레짐작하고 그러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비자 유지 규정이 강화돼 이민국에 출석 일수를 신고해야 했다.
그 이유로 전처럼 적당히 학교 수업을 빼먹지 못하고 매일 학교에 출석했다.
겨울철이라 춥고 눈이 오는 날이 많아 내 주 수입인 주말 건축일을 거의 못 했다.
밤에 버지니아 알링톤 지역 로슬린 전철역 내, 한국인이 주인인 잡화점에서 파트타임으로 몇 시간씩 일해 번 돈으로는 한 달에 600$(약 66만 원)인 학비 내고 나면 끝이었다.
그달 집세를 낼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집주인 아줌마는 그달 집세 못 받을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들어올 때 한 달 치를 보증금으로 미리 냈기 때문이다.
그 집 주인 아줌마는 우리 사는 모습을 보니 집세를 매달 못 낼 것 같다고 판단이 됐는지, 그달 12월 초순에 미리 신문에 광고를 내고 들어올 사람과 계약을 마쳤다.
그 집에서 나와서 얼마 후에 나는 주일날 나갔던 교회 입구 광고란에서 그녀의 활짝 웃는 사진을 봤다.
실생활과는 완전 딴판인 교회에서만 인자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 선교지에서 찍은 사진인데 선교지 어린이들과 무슨 놀이를 하며,
그 인자한 얼굴 앞으로 두 손을 흔들거리며 환한 미소, 우리 가족한테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미소를 보았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교회 안팎 행동이 전혀 다른 그녀의 미소가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노심초사하는 시간 20여 분쯤이 지나니 우리 앞에 키가 조그마한 한국 아줌마 한 분이 나타났다.
이름이 수라고 했다. 원래는 관수인데 주위 사람들은 그냥 수라고 부른다고 했다.
수가 나타나기 전에 아내가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여자끼리니 자기가 사정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 나보고는 절대로 나와 집주인 대화에 옆에서 끼어들거나 참견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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