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웃으며 기도하면서 하나님한테 하나씩 바치는 동전이냐고 했더니, 아내도 웃으면서 진짜 그렇다고 했다.
아내가 말하기를 기도 숫자 세는 동전이라고 했다.
기도를 몇 번씩 하냐고 했더니 한 사람당 하루에 천 번씩 한다고 했다.
아침에 300번 점심에 300번 저녁에 400번 해서 하루에 천 번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동전을 한 사람당 30개씩 갖고 10번 하면 동전 한 개를 한쪽에 치우고 동전 30개를 다 치우면 300번이라고 했다. 저녁에는 그러고도 100번 더 한다고 했다.
무슨 기도 하느냐고 하니 우리 아파트로 이사 가게 해달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게 될 일이냐고 했다.
나는 학생 신분이라 일할 수 있는 사회 보장 번호가 없고, 설사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 보장 번호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 네 식구가 살려면 법적으로 방 두 개짜리여야 한다.
그런 크기의 아파트를 얻으려면 1년 소득이 최소한 45.000$(약 5.000만 원)가 된다는 것을 서류로 증명해야 하는데, 지금 내 학생 신분에 가당치나 하는 일이냐고 했다.
아내는 자기는 그런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애들하고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라고 했다.
그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 지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수네 집에 이사 들어간 지 한 달 15일 만에, 아내와 아이들의 기도한 대로, 우리 가족은 내가 그전에 살던 애난데일에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이사해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10여 일 전쯤에 나 일하는 주류 소매점으로 전화가 왔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와서 룸메이트 생활을 한 달쯤 했던 애난데일의 현준이 엄마한테 내 차 교통 범칙금이 자기 집으로 나왔다고 했다. 차를 살 때 나는 안정된 거처가 없으므로 그 집 주소로 차 등록을 해서 차 세금이나 보험료가 그 집 앞으로 나오게 돼 있었다.
내가 집 주소가 안정될 때까지 현준이네 주소로 좀 하자고 양해를 얻고 무슨 일 생기면 전화 좀 주라고 했다.
그때는 집 전화도 없고 핸드폰도 없을 때라 자주 바뀌는 내 직장 연락처를 항상 현준이 엄마한테 알리고 있었다.
나는 저번 수요일에 학교 근처에서 우선 멈춤 표시판을 한 번 지났는데 그 교통 법규 위반 통지서가 나왔나 보다며, 이번 주말에 집에 들른다고 했다. 토요일 늦게 현준이네 아파트에 들렀더니 그게 맞았다.
현준이 엄마는 그동안 오랜만이라며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냐고 물어 버어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키에서는 식구가 넷이라 월세방 한 칸짜리는 얻을 수가 없어 지금 메를랜드에 조그만 월세방에서 네 가족이 산다고 했다.
현준 엄마는 그 조그만 방에서 네 식구가 불편해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했다.
나는 그냥 네 식구가 딱딱 붙어서 살아, 온 집안 식구가 똘똘 뭉쳐져 스킨십도 저절로 되고, 그런대로 그냥 견디며 살만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여튼 고맙다고 교통 법규 위반 통지서를 가져왔다.
그로부터 10일쯤 후 그 현준이 엄마한테 또 내가 일하는 주류 소매점 가게로 전화가 왔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있으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아파트 입주할 자격 조건이 안 된다고 하니, 이미 서류는 다 됐으니 자격 같은 거 걱정 말고 그냥 와서 돈만 내고 살면 된다고 했다.
자가가 전화해 놓을 테니 파리바게뜨 빵집 헤롤드 권 사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다음 날 빵집 사장을 만났더니 권 사장이 설명하기를,
자기 명의로 아파트를 렌트하고 한국에서 제빵 기술자를 한 달 전에 초빙해 미국에 입국했다고 했다.
빵 기술자 장인이 두 주일 전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제빵 기술자가 한국에 장인 장례식에 갔다 오면서 비자 문제로 워싱턴 달라스 국제 공항에 잡혀 있다, 미국 재입국을 못 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 남은 제빵 기술자의 아내와 자녀들도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명의로 1년 렌트 계약한 아파트를 계약 해지하려면 몇천 불이나 되는 해약금을 물어야 해, 대신 살 사람을 구하는 중이라 했다. 지금 입주하면 한 달밖에 안 살았으니, 앞으로 11개월을 살 수 있고 사는 동안 아파트 임대료를 밀리지 않고 잘 내면 내년 재계약도 자기 명의로 해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해약금 몇천 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적극적이었지 싶다.
나는 웬 떡이냐 싶었다. 내가 입주한다고 하니 그럼 한 달 치 아파트 임대료를 보증금으로 자기한테 예치하라고 했다.
그 예치금에 입주할 한 달 치 아파트임대료를 미리 내야 해서, 모두 합쳐 3.500$(약 380만 원)가 필요했다.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다시피 어렵게 살고 있는 내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
급히 한국에 전화해서 1.500$(약 170만 원)를 만들고 나머지 2.000$(약 220만 원)는 방 두 개를 세놓아 준비했다.
아파트 입주 규정에는 룸메이트가 안 됐지만, 아파트 임대 사무실에서 그 단속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대개 그 방법으로 비싼 임대료를 보충했다.
아파트 방 세 놓는다고 하니 신문광고를 내니 거리가 워싱턴 D.C 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고, 한인 밀집 지역이라 일주일도 안 돼 금방 방 두 개가 나갔다.
방 하나에 한 달에 500$(약 55만 원)에 예치금 500$( 약 55만 원) 합쳐 1.000$( 약 110만 원).
그래서 방 둘이니 2.000$( 약 220만 원)가 됐다.
방 두 개를 다 세주고 우리는 부엌 옆 거실 공간을 커튼으로 막아 방 하나를 만들어 사용했다.
메릴랜드에 살았던 조그만 방에 비하면 운동장 같은 거실을 누구 눈치 안 보고 우리 맘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됐다고 하니 수가 너무 좋아했다.
그러면서 원래는 우리 사정으로 나가는 거니 받을 수 없는 돈인데 한 달 치 방세 350$( 약 39만 원)에서 우리 가족이 산 일수 15일 치를 제하고 170$(약 20만 원)까지 돌려주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수가 장거리 출장 갈 때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여행 가방이 너무 낡고 오래되어, 아내가 미국에 오기 직전 한국에서 산, 비행기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보라색 조그마한 캐리어 여행 가방을, 우리는 어디 여행 다닐 형편이 안 돼 별로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아 수에게 선물로 주고 왔다.
그해 우리 가족은 수에게 온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았다.
검정 빨강 파란 컬러 펜으로 글씨를 큼지막하고 조화를 이뤄 “메리 크리스마스”라 쓰고, 두 아들도 많이 컸겠다며 언제 시간을 내 우리 가족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엽서에는 10$짜리 지폐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은 하루하루 살기 급급해 우리는 수를 찾아볼 여유가 없었다.
10여 년 세월이 흘러 이제 우리도 좀 살만하고 안정이 돼 언제 일요일 날을 잡아 온 가족이 수를 만나러 가자고 계획을 잡았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도 엄마 생일 때가 마침 여름 방학이니, 그때 수를 만나러 가자고 날을 잡고 우리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수를 만날 일이 일주일쯤 남았을 때, 밤늦은 시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가 다니는 교회를 다니며 수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작년에 우리 사는 근처로 이사 온 여자 배 집사님한테 온 전화였다.
며칠 전에 수가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출장을 다녀오다 고속도로에서 덤프차에 받히는 대형 교통사고가 나, 손 쓸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했다. 배 집사님이 수가 안치된 병원으로 달려가니 직업 군인인 아들은 독일에 파견 나가 복무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가족은 아무도 없고 유류품으로는 수가 평소에 애용하는 조그만 보라색 여행 가방이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선물하고 온 여행 가방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슬픈 소식을 듣고 밤새 흐느끼며 잠을 못 이루었다.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해 눈발이 흩날리는 엄동설한의 12월 23일 밤,
수와 만났던 그날 저녁 일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날 애들이 하나님 원망하게 될 것이 제일 걱정이 된다고 하자, 수가 잠깐 망설이는 수의 눈에서, 아내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느껴졌다고 했다.
수가 당장 이사와도 된다고 허락하는 그 순간을 자기는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내는 그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늘 우리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이사 오면서는 너무 경황이 없어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그때 5살 7살이었던 두 아들은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 되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각자 자기 생활을 잘하고 있다.
우리 부부 역시 이제는 많이 안정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 엄동설한에 오갈 데 없는 우리 가족에게 방 한 칸을 선물한
그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수에게 늦었지만, 그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수 !관수!
그해 겨울 방 한 칸 선물 정말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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