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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생활 경험 수기

달빛 물든 쌀포대(2)

by 정성 글 2025. 2. 23.

미국 이민 경험 생활

 

할 수 없이 밤에 일하는 식품 도매점이나 주류 소매점 같은데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마저 쉽지 않았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있어야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데, 그런 연고가 전혀 없으니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주 수입은 토요일과 일요일 건축 잡부 일해서 받는 일당이 전부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메릴랜드주에서 한 시간여 차를 운전해 그전에 내가 살았던 버지니아주 애난데일 7.11 편의점 앞에서 남미 노동자들 틈에 서 있다가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내 수입 전부였다.

하루 일해 봐야 고작 하는 일이 기술자들 도와주는 헬퍼 일이라, 어떤 날 밤늦게까지 일해 일당 100$(약 11만 원)를 받으면

 

그날은 운수대통한 날이고, 대부분 일당이 70$( 약 8만 원) 선이었다.

한 달 내내 주말을 하루도 허탕 안 치고 8일 일해야 600$에서 700$(약 77만 원)가 총수입이어서, 한 달에 최소한 2.000$ (약 220만 원)이 들어가는 생활비를 맞추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 결석을 하고 일주일에 3.4일씩 하루 일당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일당 헬퍼가 필요한 대개의 건축업자가 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나하고 일을 해 보고서는 말도 통하고 시키는 일은 곧 잘하니, 쉬지 말고 일주일 내내 계속하자고 했지만, 나는 학교 출석하는 일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의 학교만 안 다니면 지금의 생활을 그럭저럭 버텨 나갈 수 있겠는데 학교를 안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마저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며칠 전에 학생과에 불려 갔다.

대부분 유학생은 학비를 6개월 치를 학기 시작 전 등록을 하며 한 번에 다 냈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한 번에 못 내고 한 달씩 나누어 내는 데도 그것도 제때 못 내고 있었다.

얼마 전, 학비 연체 문제로 면담 요청이 또 있었다. 그 전 두 번이나 면담해서 안면이 익은 50대 중반, 금발의 백인 여성 학생 주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결석을 많이 하면 학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이민국에 출석 일수 신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민국에 신고가 제출되면 나의 학생비자가 취소되어 불법체류자가 될 게 분명했다.

나는 앞으로 출석을 잘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용지를 한 장 주더니 사인을 하라고 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학교에서는 충분히 이 사항을 학생에게 알렸고, 앞으로 다시 출석률이 미달이면 학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퇴학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결석도 못 하게 됐으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설상가상으로 연 2주나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날씨로 인해 주말 일당 일을 못 해 수중에 돈이 없어져 가니, 애가 타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가 돈 걱정에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기운이 하나도 없이 시무룩해 있었다.

어디 아프냐고 하니, 아내는 멈칫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애들이 밥을 안 먹어서”라고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집 뒤 지하 셋방으로 들어오는데 애들이 출입문 앞에서 공기놀이하는데 둘 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핼쑥해 보였다. 그래서 애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왜? 하고 물으니, 아내의 눈은 출입문 옆에 놓인 쌀 포대를 쳐다봤다.

애들이 아침에 저 쌀 포대를 보고 아침부터 밥을 안 먹는다고 했다.

쌀 포대 쪽으로 가서 보니 쌀 포대 속 바닥이 보일 정도로 쌀이 바닥에 조금 남아 있었다.

쌀 푸는 조그만 그릇으로 두세 그릇쯤 되는 우리 식구 한두 끼 먹으면 끝날 양이었다.

 

내가 내일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쌀값을 좀 꾸어 올 테니 애들한테 식량 걱정하지 말라 하고, 당신은 어서 밥해 애들 먹이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한테 돈을 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염치없어서 그 짓도 못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일은 학교 끝나고 신문에 난 구인 광고란을 보고 밤에 하는 일을 잡아야겠다.

그래서 주인에게 잘 말해서 우선 쌀값을 좀 가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신문에 구인 광고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난다는 걸 그즈음에야 알았다.

그래도 워싱턴 D.C 흑인 밀집 거주 지역에 있는 주류 소매점이나 식품 도매점에 가끔 일자리가 났기 때문에 운만 좋으면 내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류 소매점은 밤늦게 *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약이 취한 상태에서 많이 드나들어 가끔 총기 사고가 났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대부분 그런 일들은 피했다.

미국은 총기가 난무하기 때문에 대부분 흑인들이 *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로 가게에 들어와 단돈 몇십 불 때문에 총을 들이대고 돈을 강탈해 가는 사고가 가끔 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리꿔 스토어’라 불리는 주류소매점 일은 될 수 있으면 다 안 하려 피했다.

식품 도매점은 저녁내 추운 냉동 창고에서 무거운 냉동 물건 상자를 정리하는 일이라 대부분 그런 일은 남미에서 건너온 불법체류자들 몫이었다.

이 판국에 힘들고 목숨이 위험하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애들이 식량이 없어 굶는 것을 생각하면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나중 일이고 나에게 지금 시급한 일은 어린 두 아들과 아내를 굶기지 않으려면 내일 당장 쌀 한 포대를 구해 오는 것이었다.

 

내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일자리를 잡아야 했다.

저녁 내내 내일 일자리 걱정 때문에 뒤척대느라 잠이 안왔 다.

이튿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판대로 달려가 25센트 자리 코인 5개, 1$ 25센트를 넣고 한국일보 한 부를 꺼내 들었다.

구인난에서 주류소매점과 식품소매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 구한다는 가게 5개를 추려내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가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는, 신문에 나온 번호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두 군데는 이미 사람을 채용했다고 했고, 나머지는 세 군데에서 두 곳은 조건이 나하고는 안 맞았다.

다 좋은 데 시간이 문제였다. 오후 2시까지 가게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아쉽지만 학교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머지 한 군데는 나 사는 지하 셋방에서 거리가 제일 가까웠고 시급도 괜찮았다.

또 시간이 문제였다. 학교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고 사정하며 시간을 조금 조정할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건 당신 사정이고 우리 가게는 오후 2시 10분 전까지는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몰차게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인제 어쩌지” 하며,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어젯밤 거의 한숨도 못 자고 오늘 온종일 전혀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현기증이 나 어디 가서 좀 앉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몰 한쪽 모퉁이 나무 밑에 검정 페인트가 칠해진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어깨에 멘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넋 나간 사람처럼 두어 시간 그러고 앉아 있었다.

어디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일가친척 친구 하나 없는 이 땅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쌀 한 포대를 구할 길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식량을 가지고 나타날 나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핏기 없이 핼쑥한 얼굴들, 7살 살 된 두 아들과 시름에 잠겨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이대로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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